“안전한 임신중지 의료 환경 마련하라” 전문가들 한목소리

형법상 ‘낙태죄’가 효력을 상실한 지 약 4년이 지났지만, 국회와 정부가 임신중지를 위한 안전한 의료 환경 구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 여성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임신중지 시술에 대한 건강보험 전면 적용과 유산유도제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개선을 촉구했다.

14일 오후 2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등 여러 단체들은 정부와 국회에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전달했다. 이들은 “모든 임신중지 의료 행위에 대한 명확한 지침과 가이드 마련, 건강보험 적용”을 촉구하며, 국회에는 “피임, 임신, 출산, 양육 등 재생산 전 과정에 대한 보건의료 서비스와 연계 지원 체계를 법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낙태죄 비범죄화에 부합하지 않는 약사법 및 의료법 조항의 개정이 필요하다”며, 임신중지를 정상적인 의료 행위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은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과 2021년 낙태죄 효력 상실 이후에도 정부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의료 체계를 마련하지 않은 현실을 비판했다. **고경심 산부인과 전문의(살림의원)**는 “입법 공백 상태가 길어지며 잘못된 정보가 유통되고, 검증되지 않은 해외 직구 유산유도제나 가짜 약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일부 병원에서는 수술적 임신중지와 약물 유산유도제를 비싼 가격에 제공하면서 경제적 접근성이 제한되는 문제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에도 충분한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은 과거에도 합법적 임신중지가 가능했으나, 가해자를 고소하지 못한 피해자는 해바라기센터와 같은 성폭력 피해자 지원 병원에서조차 치료를 거부당하거나 비싼 의료비를 부담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또한, 정부의 유산유도제 도입 지연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동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사무국장은 “미페프리스톤을 포함한 유산유도제는 임신 초기(9주 이내) 95~98%의 성공률을 보이며, 심각한 부작용이 없는 안전한 방식으로 전 세계 99개국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처럼 임신중지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는 이러한 약물의 도입이 더욱 중요하다”면서도, 식약처가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을 이유로 유산유도제 허가를 미루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간담회를 통해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한 법·제도적 정비와 함께 실질적인 의료 지원 체계를 마련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